박산들 작가의 작업은 ‘정상’이란 규범에서 소외된 감정들을 끌어내는 여정이다. 그에게 있어 우울이나 불안은 진실과 재회하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의 회화 속 모호함 역시 마찬가지다. 모호한 베일은 그 너머의 것을 은밀하게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우리 일상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작가님에게 작업이란 어떤 것인가요?
넋두리죠. 망자의 넋을 대신 정하는 말. 이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유령이라고 생각해요. 정상, 평균, 보통. 사회에서 규정한 ‘보통 사람’이 되기 위해선 유령이 되어야만 하잖아요. 구분의 질서는 그 유령성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고요. 그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불안과 우울을 느끼게 되죠. 제작업의 핵심은 결국 우울감이에요. 그런데 세련됨이 주류인 요즘 세상, 속된 말로 ‘쿨찐병’에 취해있는 세상에서 감성적 영역은 오글거림, 피곤함 정도로 치부되더라고요. 내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금기시되고. 그런 맥락에서, 제작업은 세련됨과 거리가 멀어요. 촌스럽고 지루한 우울감을 말하고 있으니까.
주로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저의 우울은 보통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으로부터 시작돼요.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이 유사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고요. 저는 주로 불편하고 민감한 주제를 개인의 우울감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강제 철거 현장, 정상 가정의 폭력성. 그런 것들은 마주하기 싫은 진실이죠. 이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셈 치며 살아왔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들은 모르던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이미 아는 것과 다시 조우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제 그림 속 모호함은 일종의 연막일지도 모르겠어요. 지나치게 직접적이거나 설명적인 것들은 종종 바라보기보단 그냥 눈을 감고 싶게 만들잖아요.
회화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 폭의 그림으로 정확한,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 한계야말로 회화의 매력인 것 같아요. 작가와 관객 사이 쌍방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달까요. 애초에 일방적인 것을 전하거나 가르치려 들 수 없으니까요. 회화는 비밀이 많은 매체라고 생각해요. 주관적인 함축과 암시에서 모든 걸 읽어내기란 쉽지 않죠. 불가해하고, 숨겨진 것도 많고. 그래서 더 파고들어 알고 싶게 하는 것이 회화의 방식이라 생각해요.
투쟁 현장에서 작업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18년 봄, 처음 접한 투쟁 현장에서 마주한 건 참을 수 없이 무거운 현실이었어요. 국가와 법이라는 권위 아래 행해지는 ‘합법적’ 폭력이요. 서울 한복판에서 무자비한 폭력이 일어나고, 민중을 수호해야 할 경찰이 그를 묵인하는 현실이죠. 그걸 보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협소한 세계에만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의 저는 그곳의 사람들을 타자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저와 그들은 다르지 않았어요. 우린 모두 사회적 질서라 불리는 것에 의해 소외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운 의문이 제 뒤를 따라다녔어요.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일이 정말 유의미한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쉽게 말해 현타를 느낀 거예요. 저는 계속해서 무력감에 시달렸고, 한동안 현장에 발걸음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연대하는 예술가들과 함께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제 괴로움을 승화시킬 방법을 찾게 됐죠. 예술로 연대하기.
노량진 수산시장이야기를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인가요?
노량진 수산시장은 ‘중앙 도매시장’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할 시장임에도 사기업인 수협이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어요. 수협이 수산시장의 소유권을 산 거예요. 수협은 시장의 현대화를 내세우며 신시장 건설을 추진했어요. 계획 단계에서 상인들에게 동의서를 받아갔는데, 막상 공사가 시작되니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완성된 시장은 도저히 원활한 장사를 유지할 수 없는 환경이었죠. 한 상인이 그러더라고요. 시장을 지으랬더니 목욕탕을 지어놨다고. 수협은 이런 부당함에 반대하는 상인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했어요. 하지만 이미 동의서에서 명했다는 이유로 법정 싸움에서 패소했고, 4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당한 상태죠. 현재는 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수산시장에 대한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나요?
처음엔 계획도 없이 무작정 현장을 찾았어요. 육교 위 바닥에 앉아, 짧은 시간 내에 그림을 그리려다 보니 단편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과정부터 시작하게 됐죠. 지난 전시에 걸린 그림들도 그 연장선이고요. 직접 매단 천막들 사이엔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어요. 붉은 조끼나 기름통 같은, 투쟁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요소도 있었고요.
알듯말듯, 부유하는 이미지를 그리게 된 건 이때부터인 것 같아요. 이전엔 더 많은 걸 담으려 노력했는데, 수산시장 작업 이후론 덜어냄으로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됐거든요. 어떤 민감한 주제를 이야기할 때, 불편함보단 모호함이 앞서는 방식을 찾아가려 해요. <대집행>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 친구는 그게 수산시장을 지키는 정령인 줄 알았대요. 하지만 그 정령 같은 형상은 사실 행정 대집행에 투입된 경찰들이었죠. 그걸 알고 나니 갑자기 그림이 무섭게 느껴진다고. 이게 제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호함 뒤에 감춰진 어떤 것을 궁금해하도록, 결국 직면하도록 유도하는 일이요.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최근엔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된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유년 시절부터 강요받던, ‘정상 가정’이란 환상에 대한 이야기죠.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했던 작업인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시작 단계에만 머물렀던 것 같아요. 더 넓은 세상에 다녀오고 나서야 방향성이 잡히는 느낌이더라고요.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으나, 이제는 정말 완결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새로운 방향성을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아마 앞으로도 저 스스로의 경험과 감각을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 같아요. 계획이 있다면 그 방법론에 대한 연구 정도일 것 같네요.
예술이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확신이 잘 서지 않았었어요. 좌절도 해봤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붓을 놓은 기간도 꽤 길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전 아직 예술의 가능성을 믿어요. 숨을 쉬는 걸 의식하는 순간 호흡이 불편해지듯,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일. 인위적인 질서를 인식하도록, 해방과 변화를 갈망하도록 만드는 일이 예술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감각의 영역을 건드려, 설명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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